앙투안 쿠아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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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앙투안 쿠아즈보는 1640년 리옹에서 태어나 1720년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그는 17세에 첫 작품을 제작했으며, 파리로 건너가 고대 로마 조각상 사본을 제작하며 실력을 쌓았다. 1676년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입성하여 베르사유 궁전과 마를리 궁전의 장식을 담당했으며, 1678년 아카데미 교수가 되고 1702년에는 회장이 되어 조카들을 비롯한 프랑스 조각가들을 교육했다. 쿠아즈보는 기념상과 흉상 제작에 뛰어났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 기마상, 앵발리드의 샤를마뉴 대제 석상, 흉상 작품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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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쿠아즈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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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원어 이름 | Antoine Coysevox |
출생일 | 1640년 9월 29일 |
출생지 | 리옹 |
사망일 | 1720년 10월 10일 |
사망지 | 파리 |
직업 | 조각가 |
국적 | 프랑스 |
사조 | 바로크 |
스승 | 루이 르랭 |
배우자 | 마르그리트 케레 |
자녀 | 마리 쿠아세보 마르그리트 테레즈 쿠아세보 |
주요 작품 | |
주요 작품 목록 | "영광의 여신" (1702년 ~ 1705년) "마를리의 물을 마시는 님프" (1686년) "루이 14세" (1686년)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 (1680년) "대공 루이" (1690년) "샤를 르 브룅" (1676년 ~ 1679년) "장바티스트 콜베르" (1683년 ~ 1685년) "카르디날 마자랭" (1689년 ~ 1692년) "니콜라 드 카티나" (1716년) "르텔리에 후작" (1685년) "르텔리에 부인" (1691년) 루이 14세 기마상 정의의 여신 힘 키벨레 여신 론 강 센 강 튀렌 원수 평화 전쟁 가을 플로라 여신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 슬픔에 잠긴 아이 |
수상 | |
수상 내역 |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 회원 |
2. 생애
앙투안 쿠아즈보는 1640년 프랑스 왕국 리옹에서 태어나 1720년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조각가이다. 17세 때 성모자상을 제작하며 조각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1] 루이 르랑베르의 공방에서 고대 로마 시대의 대리석 사본을 제작하며 실력을 쌓았고, 1667년부터 4년간 스트라스부르에서 사베른 성의 조각상을 제작했다.[5]
1676년 샤를 르브룅의 흉상을 제작한 공로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입성하였으며,[3] 1677년부터 베르사유궁과 마를리궁의 장식을 담당하는 등 왕실 조각가로 활동했다. 1678년 왕립 아카데미 교수를 거쳐 1702년에는 아카데미 회장이 되었으며,[4] 조카 니콜라스 쿠스투와 기욤 쿠스투 등 후진 양성에 힘썼다.
2. 1.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
1640년 9월 29일 프랑스 왕국 리옹에서 태어났다. 쿠아즈보의 가문은 프랑슈콩테 (당시 스페인령)에서 이주해왔으며 아버지도 조각가였다. 17살 때 생애 첫 작품으로 성모자상을 제작하였다.[1]1657년 파리로 건너와 조각가 루이 르랑베르의 공방에 취직하였다. 이 시기에는 〈메디치의 비너스상〉, 〈카스토르와 폴룩스〉 등 고대 로마 시대의 대리석 사본을 제작하며 실력을 다듬었다. 1666년 르랑베르의 조카딸인 마르그리트 킬레리에와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아내를 잃고, 1679년 클로드 부르딕트와 재혼했다.[2] 1667년 스트라스부르 주교구의 퓌르스텐베르크 추기경으로부터 사베른 성의 조각상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에서 4년간 머무르며 작품제작에 몰입한 뒤 1671년 파리로 돌아왔다.[5]
1676년 프랑스 국왕의 전속화가였던 샤를 르브룅의 흉상을 제작한 공로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입성하였다.[3] 1677년~1685년 르브룅이 주도하는 조각·회화·장식 부문 우수작가로 선발되어 왕실에서 건설하던 베르사유궁의 건물과 정원의 장식을 담당하게 되었다. 1701년~1709년 국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의 어지러운 사교행사와 의식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마를리궁을 짓기 시작하자 쿠아즈보도 그곳에 동행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678년 왕립 아카데미 교수에 임명되고, 1702년에는 아카데미 회장이 되어 연금 4000FRF를 지원받게 되었다.[4] 아카데미 회장 재직 당시 조카 니콜라스 쿠스투와 기욤 쿠스투를 비롯한 프랑스 조각계의 한 세대를 교육하는 데 힘썼으며, 쿠아즈보의 가르침을 받은 작가들은 18세기 초 프랑스 조각계의 주요 작가로 거듭났다.
2. 2. 스트라스부르 시기 (1667년~1671년)
1667년 스트라스부르 주교구의 퓌르스텐베르크 추기경으로부터 사베른 성의 조각상을 제작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곳에서 4년간 머무르며 작품 제작에 몰입한 뒤 1671년 파리로 돌아왔다.[5]2. 3. 왕실 조각가로서의 활동 (1676년~1720년)
1676년 프랑스 국왕의 전속화가였던 샤를 르브룅의 흉상을 제작한 공로로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에 입성하였다.[3] 르브룅이 주도하는 조각·회화·장식 부문 우수작가로 선발되어 1677년~1685년 왕실에서 건설하던 베르사유궁의 건물과 정원의 장식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1701년~1709년 국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의 어지러운 사교행사와 의식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마를리궁을 짓기 시작하자 쿠아즈보도 그곳에 동행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예술계에서도 쿠아즈보의 명성은 꾸준히 성장해 왔다. 1678년 왕립 아카데미 교수에 임명되고, 1702년에는 아카데미 회장이 되어 연금 4천 리브르를 지원받게 되었다.[4] 아카데미 회장 재직 당시 조카 니콜라스 쿠스투와 기욤 쿠스투를 비롯한 프랑스 조각계의 한 세대를 교육하는 데 힘썼으며, 쿠아즈보의 가르침을 받은 작가들은 18세기 초 프랑스 조각계의 주요 작가로 거듭났다.
2. 4. 아카데미 회장과 교육 활동
1678년 왕립 아카데미 교수에 임명되었고, 1702년에는 아카데미 회장이 되어 연금 4천 리브르를 지원받게 되었다.[4] 아카데미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카 니콜라스 쿠스투와 기욤 쿠스투를 비롯한 프랑스 조각계의 한 세대를 교육하는 데 힘썼으며, 쿠아즈보의 가르침을 받은 작가들은 18세기 초 프랑스 조각계의 주요 작가로 거듭났다.2. 5. 죽음
172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3. 작품 활동
쿠아즈보는 특정한 관념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낸 조각상을 많이 제작하였다. 베르사유궁의 '전쟁의 방'에 있는 루이 14세의 부조 기마상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모습으로 말을 타고 적을 짓밟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승리'가 월계관을 수여하고 있다.[5]
마를리궁에서는 〈메르쿠리우스〉와 〈페메〉, 〈센강〉, 〈마른강〉, 〈넵투누스〉, 〈암피트리테〉를 제작하였다. 1699년 석고상으로 먼저 제작되었고, 1705년 대리석상이 완성되었다. 1796년 프랑스 혁명 당시 국유재산으로 압수되어 흩어졌는데, 〈센강〉과 〈마른강〉은 생클루궁으로, 〈넵투누스〉와 〈암피트리테〉는 1801년 브레스트로 이전되었다. 1708년~1710년에는 〈판〉, 〈플로라〉, 〈드리아데스〉를 제작하였다. 〈판〉은 루브르 박물관에, 〈플로라〉와 〈드리아데스〉는 튀일리궁에 소장되어 있다.
앵발리드 왕실 예배당 중앙돔 정면에는 샤를마뉴 대제의 석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니콜라스 쿠스투의 루이 11세 조각상과 짝을 이룬다. 앵발리드 예배당 윗층의 4대 미덕 우화상 역시 쿠아즈보의 작품이다.
생퇴스타슈 교회의 콜베르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의 마자랭 추기경 조각상, 생니콜라스뒤샤르도네 교회의 르브룅 조각상 등 총 12점의 석관용, 장례용 조각상을 남겼다.[5]
쿠아즈보는 당대 유명인의 흉상을 여러 점 남겼다. 그의 흉상은 정확하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세부묘사, 정밀도, 자세 등으로 특별한 위엄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명 | 소장처 |
---|---|
루이 14세의 흉상 | 나르본 박물관 |
루이 15세의 흉상 | 베르사유궁 |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쥘 마자랭 추기경의 흉상 | 콜레주 데 카트르나시옹 교회 |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마리아 테레지아의 흉상 | |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흉상 | |
보방 후작의 흉상 | |
부이용 추기경의 흉상 | |
멜시오르 드 폴리냐크의 흉상 | |
뒤크 드 숄느의 흉상 |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프랑수아 페넬롱의 흉상 | |
장 라신의 흉상 | |
앙드레 르 노트르의 흉상 | 생로슈 교회 |
자크베니뉴 보쉬에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다르쿠르 백작의 흉상 | |
빌헬름 에곤 폰 퓌어스텐베르크 추기경의 흉상 | |
샤를 르브룅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3. 1. 기념상
쿠아즈보는 특정한 관념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낸 조각상을 많이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념상의 대표작은 베르사유궁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베르사유 궁전 내부 '전쟁의 방'에 있는 루이 14세의 거대한 부조 기마상이 있다. 작품 속 국왕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의 모습으로 말을 타고 적을 짓밟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승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월계관을 수여하고 있다.[5] 이밖에도 〈정의의 상〉, 〈권력의 상〉, 〈가론강〉 등의 작품이 베르사유궁에 있는 쿠아즈보의 작품이다.마를리궁에서는 〈메르쿠리우스〉와 〈페메〉를 제작하였으며, 공원에 놓일 4대 조각상으로 〈센강〉, 〈마른강〉, 〈넵투누스〉, 〈암피트리테〉를 제작하였다. 1699년 기상 여건에 강한 석고상으로 먼저 제작되었고, 1705년 대리석상이 완성되어 기존의 석고상을 대체하였다. 이후 1796년 프랑스 혁명 당시 국유재산으로 압수되어 흩어졌는데, 〈센강〉과 〈마른강〉은 생클루궁으로 옮겨졌고 〈넵투누스〉와 〈암피트리테〉는 1801년 브레스트로 이전되었다. 1708년~1710년에도 마를리궁에 설치될 조각상 3점을 추가로 제작하였는데 그 제목은 〈판〉, 〈플로라〉, 〈드리아데스〉이다. 〈판〉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플로라〉와 〈드리아데스〉는 튀일리궁에 소장되어 있다.
파리 앵발리드 왕실 예배당 중앙돔 정면에도 쿠아즈보가 조각한 샤를마뉴 대제의 석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당대 왕실 조각가였던 니콜라스 쿠스투의 루이 11세 조각상과 짝을 이룬다. 앵발리드 예배당 윗층에 설치된 4대 미덕의 우화상 역시 쿠아즈보의 작품이다.
상술한 작품 외에도 석관용이나 장례용 조각상을 총 12점 남겼는데, 생퇴스타슈 교회에 설치된 콜베르의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마자랭 추기경의 조각상, 생니콜라스뒤샤르도네 교회의 르브룅 조각상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5]
3. 2. 흉상
야외 기념 조각상 외에도 당시 유명인의 흉상을 여러 점 남겼다. 쿠아즈보의 흉상은 너무나도 정확하다는 찬사를 받았으며, 자신이 조각한 장본인에게 따로 아첨하지 않더라도 세부묘사나 정밀도, 자세 등으로 특별한 위엄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평가다.쿠아즈보가 남긴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 | 소장처 |
---|---|
루이 14세의 흉상 | 나르본 박물관 |
루이 15세의 흉상 | 베르사유궁 |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쥘 마자랭 추기경의 흉상 | 콜레주 데 카트르나시옹 교회 |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마리아 테레지아의 흉상 | |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흉상 | |
보방 후작의 흉상 | |
부이용 추기경의 흉상 | |
멜시오르 드 폴리냐크의 흉상 | |
뒤크 드 숄느의 흉상 |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프랑수아 페넬롱의 흉상 | |
장 라신의 흉상 | |
앙드레 르 노트르의 흉상 | 생로슈 교회 |
자크베니뉴 보쉬에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다르쿠르 백작의 흉상 | |
빌헬름 에곤 폰 퓌어스텐베르크 추기경의 흉상 | |
샤를 르브룅의 흉상 | 루브르 박물관 |
참조
[1]
EB1911
[2]
EB1911
[3]
문서
The terracotta is at the Wallace Collection, London (S60); the marble (1678) is at the Louvre Museum
[4]
서적
Académie Royale: A History in Portraits
Routledge
[5]
EB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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